황희조선 나무위키


전시에서는 왕이 직접 시험장에 나와 현실 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문제를 내었다. 국립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던 성균관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그 위세가 크게 약화된다. 연이은 사화로 선비들의 목숨이 줄지어 사라지고 젊은 유생들 사이에서 적당히 벼슬이나 하자는 풍조가 퍼졌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균관을 대체할 교육 기관을 새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국자감은 일종의 국립 대학으로, 성종 대인 992년 설치되었다. 사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이미 국립 교육 기관이 존재해 왔기에 성종은 명칭을 국자감이라고 바꾸고 제도를 정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자에 대한 백성들의 요구가 커지면서 점차 백자 생산량도 크게 늘어났어요. 특히 왕실에서 사용하던 은그릇을 백자로 대신하게 되었는데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 항전을 하였다 패하고 말았던 아픈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도 탄금대에는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 위령탑이 위치하고 있는데요. 1592년 신립이 휘하 장졸 8천여 명과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전적지임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으로 신립 장군의 상과 4인의 군상, 그리고 바닥의 원반은 남한강과 달천의 물결 모양을 살려 구성하여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었습니다. 단호사에는 고려 시대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도 마당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요.


조선시대의 문화는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전통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오늘날에도 한국 문화의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조선은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 기술과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민속 문화도 발달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사회는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였으나, 사회적 갈등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대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창덕궁은 정치의 공간과 생활의 공간을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룬 조선의 대표적인 궁궐로 조선의 역대 왕들 대부분이 창덕궁에서 생활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가마 안에 진흙으로 된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우기도 했어요. 기둥은 열이 가마 안을 맴돌게 해 골고루 퍼지게 하는 역할을 했어요.


1719년은 외교의례 복귀에 대한 조선의 외교방침 전달 및 대마도에서의 ‘표인차왜(漂人差倭)’의 조약체결 등 구체적인 양국의 현안문제가 있었다. 궁상각치우의 5음계 위에 변징, 변궁의 2음계를 더하여 7음계로 구성한 것이다. 김홍도는 다양한 분야의 그림에 뛰어났지만, 서민들의 생활을 담은 풍속화가 가장 유명해요. 국내에는 천마산대, 구월산대 등의 유격활동을 하는 게릴라부대 등이 존재하였다.


기록상으로 보면, 중국의 고사를 본떠서 우리의 상황에 맞게 변용한 풍속화이자 고사 인물화(故事人物畫)가 눈에 띈다. <태위공기우도 太尉公騎牛圖>는 최당(崔讜)이 공직에 봉사하다가 말년에 소를 타고 세상을 등지는 모습을 담은 사인 풍속화이다. 또한 이 시기 풍속도의 복식이나 양식을 보면, 고구려적인 특색이 짙게 풍긴다. 점무늬 옷, 끝단이 주름무늬인 상의, 대님을 맨 바지, 절풍의 모자 등에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복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인물의 다리 부분을 사선 방향으로 배치하여 움직임을 표현하는 점 등에서 고구려 특유의 양식이 뚜렷해진다.


그런데 적극적인 공세 덕분인지 주변국가들에서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자, 조공으로 후추가 계속해서 들어오게 되었고 결국 왕실 창고에는 후추가 가득 쌓이게 되었다고 하죠. 성종은 예쁜 비단 주머니에 후추를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하사했다고 합니다. 조선초기 발생했던 간통사건과 그에 대한 경미한 처벌은 이 시기 여성들이 성적으로 무척 자유로웠음을 보여준다. 정종 원년(1399), 중추 조화의 처 김씨를 비롯한 양반사족녀들이 시끌벅적한 간통사건을 일으켰는데, 당시 이들이 관계한 간통 상대자에는 일반 사족만이 아니라 승려, 심지어 인척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이 받은 처벌은 장형 90대, 또는 단순 유배형이었다.


따라서 간통죄 폐지문제는 무엇보다 여성단체가 가장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간통 처벌은 여성의 보호차원이 아니라 여성의 간통을 전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론 남성의 간통을 용납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첩제도가 어느정도 완화시켜 주었다. 최근까지 간통죄가 성립하려면 결혼의 파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배우자의 고소가 필수적이었다. 간통죄는 부부상호간의 고소 여부에 상관없이 적발 즉시 처벌 대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간통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까지 국가가 개입하여 처벌할 정도로 성적 문란함을 엄격히 단속하고자 했다.


영조는 금주령을 어긴 사람을 최대 사형에 처할 정도로 중죄로 다스리기도 했죠.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7세 였는데 영조는 83세까지 살아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장수했죠. 그 이유로 바로 약용주인 송절주가 장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반포하지 않고 사림 계열의 젊은 관료들의 참여하에 개편하여 《신편동국통감》[5]을 다음 해에 완성했다.


조선후기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였던 강세황의 밑에서 그림과 평론을 배웠지요. 스승 강세황은 예술성이나 평론 등에서 매우 뛰어난 위치에 있었던 분입니다. 이런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학자로부터 공부한 것이, 이후 김홍도가 화가로서 크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표암 밑에서 공부를 하던 김홍도는 10대 후반에 이미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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